흐린 회색 하늘이 아침을 덮고 있었다. 그녀는 출근 시간대에 열차를 탔고, 인파의 열기와 증발하는 빗물이 창문을 김 서리게 만들었다. 유리 너머로는 멀리서 흐릿하게 수국이 피어 있었다. 마음을 닫고 진짜 자신을 억누르며, 언젠가 꽉 찬 열차 안에서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수국은 정신을 차리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수국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가라앉았고, 불안한 감정도 조용히 사라졌다. 영원히 수국만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과는 반대로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인파에 밀려 플랫폼에 내려섰다. 오늘은 대학에 가는 날이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인 그녀의 머릿속을 즐거웠던 대학 생활의 기억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갔다. 그래서 올해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지금, 점점 불안해지고 있었다. 취업 활동은 잘 풀리지 않았고, 졸업 논문을 위한 아나사키스 연구에 치여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이 실험실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고, 점점 자기를 잃어가는 것을 느꼈다. 예전엔 일주일에 여러 번 올렸던 SNS도 더는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외출이나 술자리도 끊었고, 가끔 만날 때조차 대화에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산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매일 아나사키스 연구에만 휘둘리다 보니 머릿속을 스치는 질문이었다. 함께 쌓여가는 스트레스도 커져만 갔다. 예전엔 친구들에게 스트레스를 털어놓았지만, 그런 기회조차 사라진 듯했다. 외로움을 느꼈고,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은 누구를 만나자고 초대하는 것도 두려워졌고,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의 수국 그늘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모델을 모집 중이라고 말했다. 지루하고 정체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녀는, 이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